2024년 9월 8일 주일 설교 Sean Chang, 9월 10, 20249월 10, 2024 오늘 설교 제목은 “이방인을 위한 예수님”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유대 땅에 태어나셨고 유대인들에게 먼저 천국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지 유대인들만 위해서 오신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이방인에게로 향하신 것도 아닙니다. 처음부터 메시아는 유대인뿐만이 아니라 열방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럼 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한 메시아가 하필이면 로마 문화의 중심지였던 그리스나 로마의 대 도시로 오지 않고 저 팔레스타인 변방의 시골 어촌 나사렛으로 오셨을까요?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이후 인간들은 계속해서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 인간 중심의 삶을 이어갑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인류 구속사를 계획하신 하나님께서 어디선가부터 시작을 해야 하겠는데 그래도 아담의 셋째 아들 셋의 계보를 따라서 시작하는 것이 자연스런 선택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많은 choice 가운데 셋의 계보안에 있는 아브라함을 선택하십니다. 아브라함이 셋의 계보인줄 어떻게 아느냐구요? 역대상 1장에 보면 아담부터 시작해서 셋, 에녹, 노아, 등등을 통해 아브라함까지의 계보가 나옵니다. 아담,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에녹, 므두셀라, 라멕, 노아, 셈, 함과 야벳,…셈, 아르박삿, 셀라, 에벨, 벨렉, 르우,스룩, 나홀, 데라, 아브람 곧 아브라함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하시면서 모든 열방이 그를 통해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을 그 구속사의 example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런 인류 전체의 구속사를 계획하신 하나님의 생각과 달리 선민 사상에 갇혀 온갖 실수를 하다가 결국 이스라엘은 주위의 강대국의 속국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제 하나님의 구속사의 계획에 따라 메시아가 오시는데 아브라함의 자손 중에 다윗을 통해 메시아가 오신 다는 구약의 약속대로 유대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지 않고 만약에 예수님이 영향력 있는 권력가의 집에서 태어났다면 성경의 역사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메시아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아담, 아브라함, 다윗의 후손으로 변방 이스라엘 깡촌에 태어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오신 메시아는 아까 말씀드린 대로 이스라엘만을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메시아는 과연 이방인들을 위해서도 오셨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거기를 떠나,” 즉 갈릴리 지역을 떠나, 두로 지방에 가신 것으로 시작합니다. 두로는 갈릴리의 북서쪽에 있는 대도시입니다. 그리고 거기는 유대 땅이 아닙니다. 당시 시리아에 속한 이방 도시입니다. 왜 예수님은 걸음으로 하루가 걸리는 먼 이방 도시까지 가셨을까요? 마가는 그 이유를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추측을 할 수는 있습니다. 갈릴리 지역에서는 좀 한적한 곳에 가서 쉬려 해도 사람들이 수만명씩 쫓아다녀서 도저히 쉴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사역을 하시기 보다는 열 두 제자들에게 집중을 하면서 자신의 마지막을 준비해야 하는 때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갈릴리에서는 그것이 쉽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멀리 이방 도시로 가신 것이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실제로 오늘 본문 말씀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하려고 했는데 역시 여기서도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그 집이 누구의 집인지는 모르지만 벌써 소문이 그 이방 도시까지 난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도 많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팔레스타인 지역에 있는 친척들로부터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벌써 확 퍼지지 않았겠습니까? 아니 소문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이방인들 사이에도 놀라운 기적을 행하는 예수님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생겼는지도 모릅니다. 거기서 있는데 한 여자가 소문을 듣고 찾아와서 예수님의 발 아래에 엎드립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 여자를 그 도시에서 나고 자라난 이방인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지금 일어나는 상황으로 보아 이 여자는 상위권 귀족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다급했던지 거지 신발에 붙은 껌 딱지처럼 여기던 유대인을 찾아와 발 아래 엎드리면서 귀신들린 자기 딸을 고쳐달라고 애원합니다. 헬라인으로서의 우월감이나 자존심을 다 내던지고 식민지 속국의 일개 선생에게 말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자기에게 애원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이렇게 매몰차게 거절하시는 것은 처음입니다. 당신이 피곤해도 항상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고쳐 주셨던 예수님인데 이 여자에 대해서는 매정하게 단 칼에 자르십니다. 더군다나 여기에 나오는 개들이란 우리 lucky같은 반려견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들 먹을 것도 없는데 반려견을 키울 수 있었겠습니까? 야생 들개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이방인 여자를 들개들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매정하게 말씀을 하셨을까요? 잘 알 수는 없지만 그 여인의 믿음을 테스트하기 위한 것이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예수님은 이미 그 여인의 믿음을 아셨을 지도 모릅니다. 다만 그것을 겉으로 나타나게 해서 지금 이 광경을 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여인의 큰 믿음을 보여주려 하신 것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 떡 이야기를 하는데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의 속국으로서 많은 세금을 바치고 먹을 것까지도 바쳐서 두로에 있는 귀족들에게 양보해야 했던 상황입니다. 따라서 이 여인은 귀족으로서 갈릴리 지방 사람들이 배곯아가며 납부했던 떡으로 배불리 먹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떡에 빗대어 하나님의 축복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떡이야 빼앗아갈 수 있지만 하나님의 축복은 빼앗아 갈 수 없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유대인을 먼저 구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완전히 뒤바뀐 상황에서 이 여자도 만만치 않습니다. 아주 재치 있는 답을 합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물론 여기에 나오는 상 아래 개들은 lucky같은 애완견을 말합니다. 당시 상위권 사람들은 애완견들을 키웠습니다. 그것이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으니까요. 이 재치있는 믿음의 말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하하하! 그래, 네 믿음이 대단하구나. 내가 그렇게 모욕을 주었는데도 네가 자존심 다 내던지고 내게 간청을 하는구나. 너의 그 믿음으로 인해 네 딸이 고쳐졌으니 안심하고 돌아가거라.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이방인에게도 구원을 베푸시는 메시아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방 전도 사역을 제자들에게 넘겨주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목숨을 내걸고 지구의 땅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복음이 우리에게도 들어온 것이구요. 저는 오늘 이 본문을 읽으면서 이 여인의 포기하지 않는 강한 믿음에 위로를 얻습니다. 모욕을 받으면서도 예수님의 능력을 믿기 때문에 끝까지 붙잡고 늘어져서 응답을 받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아니, 내가 그렇게 자존심 굽혀가며 부탁했는데 거절을 해? 아, 자존심 상해. 관 둬. 그러시겠습니까? 아니면, 이 여인처럼 간절한 소원을 위해서 끝까지 붙잡고 늘어지겠습니까? 우리 기도 생활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얼마나 간절하십니까? 혹시 한번 기도했는데 답이 없어서 “그럼 그렇지 뭐 하나님이 내 기도 들어 주시겠나?”하고 쉽게 포기하십니까? 한 번이 아니라 몇 번을 기도하다가 포기하십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때로는 하나님께 조를 수 있는 권한도 주어졌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예수님도 그런 비유를 드셨습니다. 어떤 재판관이 있었는데 이 재판관은 하나님을 무서워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과부가 매일 찾아와서 억울한 일을 해결해 달라고 조르는 바람에 귀찮아서 그 재판관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매일 찾아와서 간청을 하니 귀찮아 죽겠네. 에이 귀찮아서라도 내가 이 일을 해결해야지. 이 비유를 드시면서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물론 여기서 말하는 기도는 부당한 대우를 받은 것에 대한 원한을 말하는 것이지 아무 기도나 뗑깡을 쓴다고 들어 주신다는 뜻은 절대로 아닙니다. 어떤 목사님이 그러시더라구요. 만약에 하나님이 자기가 하는 기도 다 들어 주셨다면 아마 자기가 수십명은 죽였을 것이라고. 물론 농담으로 하는 말이지만 그 농담 속에 진리가 담겨있습니다. 아직은 자세히 말할 수 없지만 저는 지난 몇 주일간 광야 기도를 통해서 정말 놀라운 체험을 하고 있습니다. 몇 주전 처음 광야를 나갔을 때는 똑 같은 기도를 몇주간 되풀이하고 돌아왔습니다. 응답을 하실 건지 아닌지도 모르는 것은 고사하고 듣고 계시는지 아닌지도 알 수 없는 가운데 하나님의 침묵에 숨이 탁 막히는 것 같은 몇 주일이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팽목사님이 다니엘의 기도가 21일간 막혔다가 미가엘 천사장이 와서 답을 가지고 오는 천사의 길을 열어주어 드디어 다니엘의 기도가 응답이 되었다는 다니엘서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도 그런 건가 하고 기다리는 가운데 기도제목들이 하나씩 풀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제 일기장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Praise the Lord! My prayers are answered!” 저는 이 말을 하면서도 조심스럽습니다. 응답된 기도만큼 응답 안된 기도도 많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면 능력의 하나님이 못 들어주실 기도가 없다고 확실히 믿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그 크신 권능을 확실히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왜 어떤 기도는 응답해 주시고 또 어떤 기도는 응답해 주시지 않는지 저는 모릅니다. 바울 사도도 자기 몸의 병이 낫게 해달라고 기도를 열심히 했는데 하나님이 낫게 해주시지 않았습니다. 천하에 바울의 기도를 안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것! 오늘 이방 여자가 보여준 것처럼 붙들고 늘어진다면, 저의 기도한 대로 이루어지든지 아니면 왜 안 이루어지는 것인지 답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적어도 내가 기도하지 않아서 안된 것이라는 후회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