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7년 14일 주일 설교 Sean Chang, 7월 14, 20248월 19, 2024 John the Baptist beheaded 오늘 본문 이야기는 지금 읽으신 대로 침례 요한이 헤롯 왕에 의해 참수를 당하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에 헤롯이라는 이름이 몇 번 나옵니다. 이 헤롯이라는 이름이 예수님과 많이 얽혀 있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헤롯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모는 예수님을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했다가 헤롯 왕이 죽은 후에 나사렛으로 되돌아와서 거기서 자랐습니다. 그래서 베들레헴 예수라 하지 않고 나사렛 예수라고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헤롯 왕에게는 아들이 몇 있었습니다. 헤롯 왕은 유대 땅 전체를 지배하던 왕이었는데 그가 죽고 나서 유대 땅을 몇으로 나누어 아들들에게 물려주었습니다. 오늘 나오는 헤롯은 헤롯 왕의 아들중의 하나인 헤롯 안티파스입니다. 비록 성경에는 왕이라고 나와있지만 좀 더 정확한 타이틀은 tetrarch 즉 분봉 왕입니다. tetra는 1/4이라는 말로 유대 땅 1/4의 통치자라는 말입니다. 이 헤롯은 나중에 예수님의 재판에도 나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이 갈릴리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예수님을 바로 이 헤롯에게 보냅니다. 그 때 헤롯은 예수님을 욕보이고 빌라도에게 다시 되돌려 보내지요. 오늘 본문의 시작은 지난 주에 12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보내어 그들이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는 기적을 행했다는 소문 때문에 예수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 소문이 헤롯 왕의 귀에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헤롯은 걱정을 했습니다. 혹시 내가 죽인 침례 요한이 살아서 돌아왔나?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기적을 행할 수 있지? 그리고 마가는 침례 요한이 참수형을 당하게 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갑니다. 헤롯 왕은 사실 침례 요한의 말을 듣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침례 요한을 죽이게 되지요. 그 이유는 헤롯 왕과 헤로디아의 부도덕적인 관계에서 시작됩니다. 헤롯 왕이 이전에 로마에 살고 있던 동생 필립을 방문했을 때 그의 아내였던 헤로디아에게 홀딱 반했습니다. 그래서 뻔뻔스럽게 지금 남편과 이혼을 하고 자기와 결혼을 하자고 달려들었는데 야심이 많고 질투가 많았던 헤로디아는 만약 당신의 지금 아내와 이혼을 한다면 결혼해 주겠다고 말을 합니다. 사실 헤로디아는 헤롯 왕과 동생 필립의 배다른 조카 딸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결혼은 근친상간이 되는 것입니다. 당시 헤롯은 이웃 국가의 공주였던 아내와 정략 결혼을 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헤로디아에게 홀딱 빠져서 당시의 아내와 이혼을 하게 되는데 이 문제로 인해 그 아내의 아버지가 군대를 이끌고 와서 헤롯과 전쟁까지 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정당치 못한 이혼까지 하면서 자기 동생의 아내인 헤로디아, 자기의 배다른 조카 딸을 아내로 맞은 것에 대해 침례 요한이 겁도 없이 야단을 친 것입니다. 왕이 지금 한 일은 부도덕한 일이고 불법입니다. 그래서 헤로디아가 침례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기회를 찾고 있었는데 드디어 절호의 기회가 온 것입니다. 헤롯의 생일 파티가 열렸습니다. 그 당시의 문헌에 보면 생일 파티가 꽤 문란했다고 합니다. 살로메의 나이가 아마도 12살 14살 정도, 결혼을 할 나이였습니다. 그런 살로메가 아마도 아주 선정적인 춤으로 헤롯 왕 즉 step father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나 하고 성경학자들은 추측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바탕으로 한 영화에 보면 exotic dancer처럼 선정적인 춤을 추는 살로메가 많이 등장합니다. 성경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아마도 살로메의 어머니 헤로디아의 음모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자기 딸을 그런 문란한 파티 자리에서 춤을 추게 하겠습니까? 혹시 여기에 나오는 헤로디아의 딸의 이름을 아시는 분이 있습니까? 네. 살로메입니다. 혹시 그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나요? 사실 살로메라는 이름이 마가복음 뒤쪽에 두 번 나오는데 그 살로메는 예수님의 죽음을 막달라 마리아와 함께 먼 발치에서 끝까지 지켜보았던 여인이고 예수님이 죽으신 이후 부활절 아침에 유향을 가지고 무덤에 갔던 여인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여자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이 살로메가 헤로디아의 딸은 아닙니다. 헤로디아의 딸의 이름은 직접 성경에 나오지는 않습니다. 나중에 조세푸스(37-100 AD)가 쓴 역사서에 헤로디아의 딸 이름이 살로메였다고 나와있습니다. 이름이 같아서 어떤 목사님들은 침례 요한의 머리를 달라고 했던 살로메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설교를 하시는데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게 선정적인 춤을 추어 가뜩이나 술에 취한 손님들과 헤롯 왕이 뿅 가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헤롯 왕이 책임질 수 없는 말을 합니다.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줄 테다. 그때 살로메는 직접 자기가 원하는 것을 말하지 않고 옆 hall에 있는 엄마 헤로디아에게 쪼르륵 달려가서 묻습니다. 이 그림에 보면 헤로디아가 헤롯 왕의 옆에 앉아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문화에 의하면 남자와 여자가 식사를 하는 hall이 달랐다고 합니다. 그런데 남자들의 hall과 여자들의 hall이 같이 붙어있었기에 헤로디아는 자기 딸이 반나의 모습으로 선정적인 춤을 추는 것과 왕의 일거수 일투족을 다 보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살로메는 옆 hall에 있는 엄마에게 가서 이렇게 물어봅니다. 엄마! 왕이 나라 절반까지라도 준다고 하는데 무엇을 달라고 할까요? 이전에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typology 즉 유형학을 알아야 한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유형학이란 이전에 있었던 사건들이 오늘 벌어지는 사건의 모형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헤롯이 살로메에게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고 한 말은 이전에 구약에 나온 말입니다. 에스더가 유대인을 살리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아하수에로 왕 앞에 나갔을 때 왕이 그런 말을 합니다. 왕후 에스더여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며 요구가 무엇이냐 나라의 절반이라도 그대에게 주겠노라 유대인들은 마가의 복음서를 읽으면서 Deja Vue! 에스더의 이야기를 머리속에 그렸을 것입니다. 에스더는 나라의 절반 대신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했지만 살로메는 나라의 절반 대신 한 사람의 생명을 앗아갔습니다.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물론 로마의 법에 의하면 일개 분봉왕이 나라의 절반은 커녕 아무런 땅도 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헤롯이 얼마나 취해서 기분이 붕 떠서 책임질 수 없는 말을 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라의 반이라도 주겠다는 말은 실제로 그렇게 하겠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만큼이라도 주고 싶다는 뜻의 당시의 표현법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헤로디아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 오호라! 잘 됐다. 침례 요한의 머리를 달라고 해라. 여러분 같으면 무엇을 달라고 하시겠습니까? 우리 말에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얼마나 침례 요한에 대한 분노가 맺혔는지 이 좋은 기회를 놓쳐버리고 고작 침례 요한의 머리를 달라고 합니다. 그 당시의 문화에 의하면 권력을 쥔 사람이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생일날 죄수들을 끔찍하게 처형하는 관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헤로디아는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를 이용했던 것 같습니다. 그 당시는 체면 문화였기 때문에 한 번 서원한 말은 왕이라도 번복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헤롯은 마음에 번민이 되었지만 자기가 한 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침례 요한의 목을 벱니다. 목을 벤다는 것은 지금 사회에서는 참으로 끔찍한 일이지만 그 당시에는 죽을 때 고통을 덜 받는다 하여 오히려 은혜를 베푸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처럼 시간을 오래 끌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은 후에 서서히 죽게 하는 방법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많은 사람들이 보도록 저자 거리에 며칠동안 놓아두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그러나 헤롯은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무덤에 장사하게끔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침례 요한은 정말 짧고 굵게 살다가 30살의 나이에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2천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죽음에 대해서 우리는 성경에서 읽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침례 요한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마태복음 11:11>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마태복음 11:14> 당시 유대인 사이에서는 엘리야는 거의 신적인 존재의 선지자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침례 요한에 대해 메시아 앞에 다시 온다고 했던 엘리야가 침례 요한이라고 했던 것은 최고의 칭찬이었습니다. 그렇다 해도 저는 한가지 의문을 지워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왜 예수님은 침례 요한이 죽게끔 놔두셨을까? 사실 침례 요한은 6개월 먼저 난 사촌 형이기도 했습니다. 신학자들도 아마 같은 의문을 가졌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런 신학적인 설명을 합니다. 첫째, 그것은 예언과 신의 섭리의 성취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과 성경의 예언의 성취에 대해서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침례 요한의 역할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그의 순교는 신의 섭리의 한 과정이고 또한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예견하는 사건입니다. 둘째, 인간의 자유 의지와 정의를 존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 의지와 그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강조하셨습니다. 헤롯과 헤로디아가 침례 요한을 죽음으로 몰아간 것은 그들의 선택과 윤리의 타락의 결과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의 사역의 본질은 근본적으로 영적인 것이지 정치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능력을 정치적인 일에 간섭하거나 고통받는 것에 간섭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것, 가르침, 고침, 그리고 결국 인류의 대속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셨습니다. 넷째, 침례 요한의 순교는 그의 모범적이고 상징적인 역할의 증거였습니다. 그의 순교는 진리와 의에 대한 굽힐 수 없는 헌신과 그의 예언적인 사역에 대한 강력한 증거임을 보여주었습니다. 손 마른 사람이나 앉은뱅이를 고쳐 주시던 예수님은 이러한 거대한 하나님의 계획속에서 침례 요한의 순교에 간섭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침례 요한도 예수님도 죽음보다 더 큰 예언과 신의 섭리의 성취가 더 중요했던 것 같습니다. 이해가 가십니까? 그래도 저는 나중에 예수님을 만나면 꼭 이것은 물어볼 것입니다. 왜 그러셨어요 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