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7월 07일 주일 설교 Sean Chang, 7월 7, 20248월 19, 2024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지만 어렸을 적에 헤롯 왕의 핍박을 피해 이집트로 피난을 갔다가 헤롯 왕이 죽은 후에 나사렛으로 돌아와서 거기서 자랐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베들레헴 예수라 부르지 않고 나사렛 예수라고 부릅니다. 이전에 제가 예수님은 팔레스타인 땅 밖으로 한 발자국도 디딘 적이 없다고 말씀드렸는데 이제 보니 예수님이 아주 어렸을 때 외국에 가 보신 적이 있네요.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지만. 이제 고향인 나사렛으로 돌아와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셨는데 아마도 나사렛 마을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처음 대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족을 너무도 잘 아는 터라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이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아니 이 사람은 스스로 일해서 하루 하루 먹고사는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 아닌가? 어떻게 그가 선생이며 기적을 행하는 사람일 수가 있는가? 특히 사람들은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했는데 당시의 유대 사회에서 어머니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특이한 경우입니다. 원래 아버지 누구 누구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 보통입니다만 아마도 여기에는 혹시 예수님을 평생 따라다녔던 소문, 즉 예수가 사생아가 아니냐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인지도 모릅니다. 여기에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4 형제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우선 야고보가 나오는데 나중에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지도자로 큰 역할을 감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야고보서를 쓴 사람입니다. 그런데 영어 이름은 James입니다. 대부분의 한글 이름과 영어 이름은 그래도 많이 비슷한데 이 야고보와 James는 상당히 거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ChatGPT40에게 물어보았더니 이렇게 답을 하더군요. 이번에는 한글로 물어보았더니 한글로 답을 하네요. 원래 희랍어 원본에는 야고보의 이름이 라코보스라고 되어있습니다. 이것이 라틴어로 번역이 되면서 라코부스가 되었다가 나중에 라코무스로 바뀝니다. 이 이름이 영어 성경에는 James로 자리를 잡았지만 원래 한국 기독교는 처음 천주교를 통해서 성경이 들어왔고 그래서 James라는 이름 보다는 Lacobus라는 이름으로 들어왔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야고보라는 한글 이름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어 이름 James 보다는 야고보가 원문에 더 가깝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유다는 아마도 유다서의 저자일 것이라고 합니다. 유다서의 1: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 부르심을 받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라 나머지 두 형제에 대해서는 현재 아는 바가 없습니다. 이렇게 가족의 이름까지 들먹이며 예수님을 배척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선지자가 다른 데서는 존경을 받지만 자기 고향이나 친척들 사이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한다. 이 말씀은 당시 유대인 사회나 더 나아가서 희랍 사회에 떠도는 속담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마가는 아주 위험천만한 말을 덧붙입니다.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잘못 해석을 하면 마치 무엇인가에 막혀서 예수님이 능력을 행사할 수 없는 것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능력을 행사할 수 없었던가요? 본문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마가복음은 특히 예수님은 믿는 자의 믿음에 반응하여 기적을 행하심을 많이 강조합니다. 예를 들면 지난 주에 다루었던 12년간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했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또 회당장 야이로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딸을 죽음에서 일으키십니다. 이렇듯 예수님의 상대방의 믿음의 정도에 비례하여 기적을 행하시는데 나사렛 마을 사람들은 그런 믿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으십니다. 기적을 행하실 수 없어서가 아니라 사람들의 믿음 없음으로 인해 기적을 행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바로 뒤에 나오는 구절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그리고 예수님은 자기의 동향 사람들의 믿음 없음을 기이하게 여기셨다고 마가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예수님이 전혀 예상하지 못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사렛을 떠나 다른 마을들을 다니시면서 복음을 전하십니다. 그리고 이제 처음으로 예수님이 사역을 위해 열 두 제자들을 보내십니다. 그동안 예수님은 열 두 제자들을 부르시고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24/7 같이 다니시며 가르치시고 기적을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노방 전도를 위해서 준비를 시키신 것입니다. 여기서 이 보낸다는 단어에는 사절단이라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즉 대통령의 명을 받고 한 나라를 대표하기 위해 보내어지는 사절단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제 열 두 제자는 예수님을 대신해서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의 특별 사절단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두 사람 씩 보내었다고 했는데 신명기 17장 6절에 보면 증인을 두세 사람을 세우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전도하는 사람들은 두 사람 씩 가는 전통이 생겼습니다. 두 사람 씩 가는 데는 장점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말씀을 전할 때 옆에 있는 사람은 영혼을 위해서 그리고 말씀을 전하는 동역자를 위해서 기도를 할 수도 있고 또 동역자가 필요한 것을 옆에서 도와줍니다. 예를 들면 더운 날 생수를 준다든지 아니면 전도지를 준다든지 등등. 사실 이단인 몰몬교와 여호와의 증인들은 꼭 두 사람이 같이 다닙니다. 혹시 길에서 하얀 와이셔츠로 멀쑥하게 차려 입고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두 청년을 보시면 거의 100% 몰몬교 전도자들일 것입니다. 이들은 2년간 전도 사역을 하는 것이 의무화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들도 노방 전도는 의무입니다. 오히려 이단들은 전도를 영광스러운 의무로 생각하고 시간을 내어서 봉사를 하는데 이는 우리 개신교에서 본받아야 할 점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들을 그냥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더러운 영을 쫓아낼 수 있는 권능을 주십니다. 이런 권능은 우리 시대에도 일어납니다. 특히 악령들이 많은 아프리카나 아이티 도미니카 등에서 이런 기이한 현상이 가끔 일어나는 것을 현지 선교사님들을 통해서 듣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말씀을 전하는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권한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런 경고를 하십니다.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어디서든지 누구의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에 발 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미션 여행을 떠나는 열 두 제자들에게 요구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양식이나 배낭이나 돈을 가져가지 않아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필요에 따라 하나님이 채우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좋은 평판을 유지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것은 복음 전함에 누가 되지 않도록 함입니다. 더 좋은 집이 있어도 머무는 곳을 바꾸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만약 더 좋은 곳으로 옮기면 있던 집 주인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자존심도 상하겠고 제자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제자들이 전하는 복음이 모두에게 환영받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만약에 어느 곳에서든지 제자들을 영접하지 않아도 기죽지 말라는 것입니다. 비굴해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발 아래 먼지를 떨어버리라고 했습니다. 발 아래 먼지는 떠는 것은 유대인의 한 풍습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방인 지역에 갔다가 유대 지역으로 돌아올 때는 이방인의 먼지를 떨어버리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영접하지 않는 사람의 집을 떠날 때 발 아래 먼지를 떨어버리라는 것은 복음을 거절한 이방인 취급을 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명백히 보이지는 않지만 복음이 전해졌을 때 구원과 심판이 같이 일어납니다. 복음이 받아들여졌을 때는 구원이 임하고 그렇지 않을 때는 스스로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의 사회에서 그렇게 까지야 말을 하지는 않겠지만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서는 항상 이 둘 중의 하나가 일어납니다. 구원 아니면 심판. 우리가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심판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역자들에게는 정말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경고의 구절입니다. 전도집회 한답시고 비즈니스 클라스 비행기를 타고 와서 최고급 호텔에 머뭅니다. 아침마다 깨끗한 새 와이셔츠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고급 승용차가 매일 아침 호텔 앞에 와서 대기하고 있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모인 사람들이 적으니까 방송에 나가야 한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한곳에 모여 앉게 합니다. 전도 집회 일정이 끝나고 한국에 돌아갈 때는 명품 물건들을 가방에 가득 채워 갑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는 정말 거리가 먼 삯꾼 목사가 아직도 있더라구요. 유명한 부흥사가 왔다고 해서 무조건 쫓아다니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정말로 나가서 예수님이 외치신 것처럼 회개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귀신을 쫓아내고 아픈 사람들을 기름을 부어 낫게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그 동안 보여주신 사역과 꼭 같은 사역입니다. 즉 회개를 선포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아픈 사람들을 낫게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독립적인 사역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야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마가복음에는 자세히 나와있지 않지만 비슷한 사건을 다룬 누가복음에는 사랑하는 제자들을 보내는 예수님의 마음이 자세히 적혀 있습니다.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처음으로 제자들을 보내면서 많은 걱정을 하신 것 같습니다. 이 아이들이 잘 할까? 사탄의 대적을 잘 이길 수 있을까? 혹시 다치거나 잘못되면 어쩌나? 그런데 나갔던 제자들이 돌아와서 흥분된 소리로 이렇게 말을 합니다. 주여, 귀신들도 주의 이름 앞에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처음으로 제자들을 미션 필드로 보내었는데 예수님이 가르치신 대로 너무들 잘 해주어서 예수님이 너무 기쁜 나머지 제자들에게 나머지 이야기를 듣기도 전에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오늘 날 이런 기적이 있을 수 있습니까? 저는 그럴 수 있다고 믿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담대한 믿음입니다. 기적이라는 것이 꼭 귀신을 쫓아내고 아픈 자를 낫게 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저는 제 주위에서 기적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렇게 바늘 하나도 들어갈 자리가 없을 것 같았던 사람이 어느 날 때가 되어 복음이 들어가니 변화됩니다. 그동안 미적 미적 신앙 생활을 하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완전히 변화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오히려 하나님에게는 이런 것들이 기적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기적을 스스로 체험할 수 있고 또 우리 주위에서 목격할 수도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