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 25일 주일 설교 Sean Chang, 8월 26, 20248월 27, 2024 지난 주 설교에서 예수님은 공생애의 3년째 마지막 해에 당신의 죽음을 앞두고 사람들을 추리기 시작하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따라다니던 사람들에게도 어려운 말씀을 하십니다.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여기에 나오는 제자 즉 disciple들은 열 두 제자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열 두 제자 외에도 상당히 많은 추종자들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제 어려운 말씀들을 하시니까 그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다시 말씀하십니다.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그러면 너희는 인자가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이 말씀은 너희가 지금 내가 하는 말도 이해를 못하는데 만약에 내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면 얼마나 더 이해를 못하겠느냐 이 말씀입니다. 우리는 열 두 제자 열 두 제자하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신 후에 남은 제자들이 열 두 명뿐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보다는 조금 많았습니다. 몇 명이었을까요? 네. 사도행전 1장에 보면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사람들이 모여서 기도에 힘썼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모인 사람의 숫자가 약 백 이십명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그 중에는 열 두 사도가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 예수님이 또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예수님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군지 아셨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리고 그 중에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도 처음부터 아셨다고 했습니다. 물론 가룟 유다를 두고 하신 말씀이겠지요. 그런데 여기에 질문이 하나 생깁니다. 왜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자신을 팔 것을 아시면서 그냥 제자 가운데 두셨을까요? 이 질문을 다루기 전에 우선 베드로의 고백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어봅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꽤 오래전에 저는 이 구절을 처음 대했을 때 예수님의 인간적인 모습을 처음 보았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예수님의 humanity에 끌리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과 같이 어울리는 것 좋아하시고 파티를 좋아하시고 높은 곳에 있는 사람들보다 그저 평범한 아니 오히려 억압받으며 힘들게 살아가는 힘없는 사람들,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낙인 찍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셨습니다. 때로는 슬퍼서 울기도 하시고 때로는 화가 나서 성전 잡상인들의 상을 엎기도 하셨습니다. 저는 그런 예수님의 humanity를 보면서 친근감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Maybe, He is one of us! 기독교에서는 전통적으로 예수님의 신성만 강조해 왔습니다. 예수님의 인간적인 모습을 강조하는 것은 오히려 믿음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에 대한 대부분의 주석도 예수님의 이 질문은 실망이 아니라, 떠나지 않겠다는 제자들의 결심을 끌어내기 위한 질문이라고 해석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평생 하나님의 입장에서 우리를 보아 오셨습니다. 물론 전지하신 하나님, 즉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라고 우리는 표현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이 과연 여러가지 제한된 상황에 놓여 살아가는 우리 인간을 100% 안다고 하실 수 있을까요? 오직 인생의 쓴맛 짠맛을 다 경험한 후에야 우리를 이해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인간으로 오신 목적중의 하나는 인간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였습니다. 인간으로서 느끼는 사랑, 희망, 절망, 슬픔, 미움, 배신, 죽음까지도. 이 모든 것을 직접 경험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오늘 짧은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은 세가지 인간으로서 겪는 경험을 하십니다. 첫째, 많은 사람들이 떠나갑니다. 여기에서 사람들에게 버림받는 경험을 하십니다. 둘째, 소수의 사람들이 남아 끝까지 믿음을 지킵니다. 여기에서 신뢰를 경험하십니다. 셋째, 그 와중에 또 가룟 유다를 통해 배신을 경험하십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이 질문을 하시면서 예수님은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궁금합니다. 3년간 같이 먹고 자면서 하늘 나라의 비밀을 가르쳤는데 과연 지금 이 시점에서 다른 사람들은 떠나가도 자기들은 끝까지 붙어있겠다고 할까? 아니면 고난의 길이 뻔히 보이니까 자기들도 떠난다고 할까? 다행히 제자들은 붙어있겠다고 해서 스토리가 계획대로 나아가지만 만약에 믿었던 열 두 제자들도 떠나갔다면 예수님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실까? 그보다도 얼마나 큰 배신감을 느꼈을까 생각해 봅니다. 다행히 베드로가 제자들 대표로 이렇게 답을 합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기쁨과 절망의 기로에서 예수님이 이 말을 들으시면서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그러면 그렇지”라는 안도의 한숨과 기쁨이 동시에 예수님의 마음에 스쳤을 것을 상상해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에는 없지만 70절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요한복음 6:70> 수천, 수만명의 추종자 중에서 꼴랑 열 두 제자. 그런데 가룟 유다를 제외한 나머지 제자들은 예수님이 기대했던 대로 땅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는 역할을 잘 감당했습니다. 거기다가 요한만 빼고는 모두다 예수님처럼 순교까지 했네요. 처음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모두 무서워서 도망을 갔던 제자들이. 그런데 오늘 베드로의 대답 중에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 우리는 한글 번역을 읽으면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지칭하는 이 표현을 그냥 지나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타이틀은 평범한 타이틀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을 가리키는 이 표현이 구약에서는 수십번 사용되었습니다. 특히 이사야서에만 30번이나 나옵니다. 신약에 와서는 공관복음서 즉 마태 마가 누가 복음에서 나오는데 그 때는 귀신들만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라는 타이틀을 사용합니다. 귀신들은 구약에서 사용한 하나님을 지칭하는 이 표현을 잘 압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대적할 때 이 표현을 씁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사람들은 이 표현을 쓰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아직 하나님으로 인식하지 못했으니까요. 그런데 오늘 베드로가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 예수님은 베드로가 별 생각없이 이 표현을 썼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16장에도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어봅니다. 너희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마태복음 16:15> 그럴 때 용감한 베드로가 이렇게 말을 하지요. 당신은 메시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마태복음 16:16> 그러자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마태복음 16:17> 이때 예수님은 베드로가 그렇게 말한 것이 스스로 알아서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를 깨닫게 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도 베드로가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라는, 유대인에게는 아주 익숙한, 그러나 하나님에게만 적용되는 이 표현을 예수님께 적용한 것은 우연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깨닫게 하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전에 말했지.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고. <요한복음 6:65>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부르시고 거기에 응답을 한 제자들이 팔레스타인 밖에 한번도 발을 내디딘 적이 없으신 예수님을 대신해서 전세계에 복음을 전했고 그로 인해서 세상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 그들의 사명을 전해 받아서 그 사역을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말씀 중에서 한가지 남은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왜 예수님은 알면서도 가룟 유다를 그냥 두셨을까요? 성경에는 이에 대한 정확한 답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질문은 신학의 영역에 속합니다. 첫째, 구약의 예언 성취 만약에 예수님이 가룟 유다를 쫓아냈다면 사건이 어떻게 전개되었을까요? 예수님은 세상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만약 유다의 배신이 아니더라도 결과는 같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가룟 유다를 쫓아낸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물론 제자들에게서 받는 배신은 아니겠지만 누군가는 가룟 유다의 역할을 해야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둘째, 끝까지 유다를 기다리심 어쩌면 예수님은 끝까지 유다를 붙들어보려 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마음속에 배신을 할 기미가 있어도 혹시나 회심하지 않을까 끝까지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유다도 끝까지 다른 제자들과 함께 사랑과 용서의 손길을 내미십니다. 우리는 이렇게 끝까지 기다리시는 예수님의 인내심에서 한 줄기의 안도감을 느낍니다. 셋째, 인간의 선택의 자유를 존중 유다의 선택의 자유를 존중하시는 것입니다. 구약에서처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도 있는 하나님이 유다의 마음을 강권적으로 바꾸실 수도 있지만 이제는 좋든 나쁘든 인간의 자유 의지를 존중하시기로 마음 먹이신 하나님이 안타깝지만 그대로 두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넷째, 인간의 나약함과 구원의 본보기 예수님은 유다를 통해서 인간의 나약함과 구원을 보여주십니다. 우리 모두는 이기적인 생각으로 배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회개할 때 구원을 보장해 주십니다. 어떠한 죄도 사하실 수 있는 용서를 베푸십니다. 다만 유다는 그 기회를 놓쳐버립니다. 유다를 통해서 우리는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배웁니다. 다섯째, 내면의 영적 전쟁의 본보기 유다도 처음부터 예수님을 배반할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자기가 생각했던 혁명의 예수님이 아니라 십자가를 생각하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내면적으로 많은 고민을 했을 겁니다. 즉 그 내면에 영적 전쟁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유다의 영적 전쟁을 후대의 믿음의 세대들에게 본보기로 보여주십니다. 결국 유다는 그 영적 전쟁에서 어두운 쪽을 선택하지만 우리는 그를 보면서 우리의 영적 전쟁에서 유다처럼 어두운 세력을 선택하지 않을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결국 유다는 최후까지 예수님이 내미시는 용서의 손을 잡지 못하고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며 자살로 인생을 마쳤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화해의 손을 잡아야 합니다. 또 우리도 화해의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내미는 화해의 손을 잡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 때문에 오셨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