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28일 주일 설교 Sean Chang, 7월 28, 20248월 19, 2024 오늘 본문에는 두개의 기적 이야기가 나옵니다. 첫번째는 소위 오병이어의 기적인데 한문으로 떡 병자와 고기 어자를 사용해서 오병이어의 기적 즉 5개의 떡과 2마리의 물고기의 기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4 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비록 작자에 따라 상세한 내용은 조금씩 다르지만 같은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병고치는 기적을 보고 어디를 가나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더군다나 12명의 사도들을 둘 씩 짝을 지어 내보내었는데 이제는 예수님 혼자가 아니라 6그룹이 전 갈릴리 지역을 다니며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며 복음을 전했으니 그 소문이 얼마나 더 널리 퍼졌겠습니까? 예수님도 제자들도 사람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먹을 시간도 쉴 시간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한적한 곳으로 떠났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미리 알고 그 곳에도 미리 가서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짜증이 날 법도 한데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수고하고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래서 천국 복음을 선포하시고 병든 사람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해가 기울어버렸습니다. 저녁 먹을 시간이 된 겁니다. 그런데 장소가 마을이나 도시가 아니라 한적한 곳입니다. 2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어떻게 저녁을 먹겠습니까? 남자만 오천명인데 여자와 아이들까지 하면 2만명쯤 되었을 거라고 합니다. 집에 가서 밥 먹고 다시 모이든지 아니면 내일 보자고 말씀하셨을 수도 있지만 예수님은 이제 원맨쇼를 하는 대신 제자들을 개입시키십니다. 왜냐하면 그 해가 예수님이 이 땅에 머무는 마지막 유월절이었고 그 유월절을 기해서 예수님은 이제 떠나실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제자들을 두명씩 짝을 지어 노방 전도 실습을 하게 하셨는데 이제 자신이 떠난 후에도 이 제자들이 자기의 사역을 맡아서 해야 하는 상황인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에게 물어보십니다. 지금 시간에 어디에 가서 음식을 사서 이 백성들을 먹일 수 있겠느냐? 물론 예수님은 답을 알고 있지만 사역 훈련을 위해서 제자들을 개입시키십니다. 빌립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 많은 사람들을 먹이려면 200 데나리온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돈이 있어도 여기는 광야인데 어디 가서 이 많은 사람들이 음식을 사먹겠습니까? 그냥 사람들을 집으로 보내시지요. 한 데나리온은 당시 하루 일당입니다. 지금 달라로 하루 일당을 $100이라 쳤을 때 200 데나리온은 2만불입니다. 2만불로 2만명이 먹을 수 있는 빵을 살 수 있겠습니까? Burger King Whopper Meal이 아니고 빵만 산다면 그럴 수 있겠지요? 그러니까 빌립이 계산은 제대로 한 것입니다. 그러나 별 뾰족한 수가 없습니다. 이때에 다른 제자 안드레가 어느 소년이 가져온 도시락을 예수님께 가져옵니다. 뭐 뺏아온 것은 아닐거고 아마 잘 달래서 그의 도시락을 예수님께 가져왔겠지요. 그런데 그 도시락에는 보리떡 5개와 작은 물고기 2마리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보리떡이라고 하니까 맛있겠다 라는 생각을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보리떡 5개! 지금은 보리가 특별식이라 귀합니다. 옛날에 한국에서 꽁보리밥에 고추장을 비벼 먹던 가난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나마 열무김치가 있으면 다행이었는데 그만큼 쌀에 비해 형편없는 취급을 받았던 것이 보리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식당에서도 꽁보리밥에 열무김치가 특별식으로 판매되고 있습니다. 보리는 10월에 벼를 추수한 뒤에 심어 겨울을 지나고 늦봄에 추수를 합니다. 봄에 벼농사를 시작할 즈음에는 겨울 양식이 거의 바닥이 날 때쯤인데 이때 보리로 끼니를 연명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가장 높은 고개가 보리 고개라는 말을 들어 보셨나요? 조선시대 왕 영조가 왕비 후보감을 찾을 때였다고 합니다. 혹시나 자기네 딸을 왕비로 삼게 되면 이를 빌미로 재정적 정치적 힘을 얻을 것이라 생각해서 많은 양반집에서 자기 딸을 추천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영조가 많은 양반집 규수를 하나씩 불러서 왕비 인터뷰를 하는데 왕이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높은 고개가 무엇인가? 모두다 높은 고개 이름을 댔는데 그 중에 한 규수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보릿고개야 말로 제일 높은 고개인 줄로 아뢰옵니다. 이 현명한 대답 때문에 그 규수가 왕비로 선택이 되었는 지는 모르지만 나중에 정순왕후로 알려진 이 규수는 백성들의 어려움을 정확히 파악했다는 말입니다. 그런 하찮은 보리떡 5개가 2만명을 먹이는 기적에 사용됩니다. 아마도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양념도 없이 소금으로만 간을 한 주먹밥쯤이었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축사를 하시고 그 보리떡 5개로 2만명을 먹이십니다. 여기에 예수님이 축사를 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식사 기도를 하신 것인데 예수님은 식사 기도를 어떻게 하셨을까요? 우리는 식사 기도를 어떻게 합니까? 혹시 손님 대접한다고 끓여 나온 라면을 앞에 놓고 20분동안 기도를 하는 바람에 퉁퉁 불은 라면을 먹어본 적이 있습니까? 기도 잘 하는 것은 알겠는데 긴 식사기도는 민폐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우리 한국식 식사 기도 문화는 어디서 온 것일까요? 하루에 세 번 기도하는 전통은 유대인의 전통에 깊이 뿌리 박혀 있습니다. 다니엘이 하루에 세 번 예루살렘 쪽을 향한 창문을 열고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는 것이 다니엘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기도는 하루 삼시 세끼 식사 기도와는 별개의 것입니다. 식사 기도를 길게 하는 것은 우리나라만의 전통인 것 같습니다. 하루에 세번 기도를 하라고 하는데 식사 시간이 하루에 세번 있으니까 따로 시간을 낼 것이 아니라 차라리 식사 때 기도를 하면 되겠다는 착상에서 길어진 식사 기도의 문화가 한국 교회에 정착이 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미국 사람들도 식사 기도는 아주 간단히 합니다. 어쨌거나 성경에 이 축사에 대한 특별한 이야기가 없는 것으로 보아 예수님은 아마도 유대인의 전통을 따르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럼 음식을 앞에 놓고 하는 유대인 전통의 축사는 어떤 것일까요? 자세한 기록이 없어 아쉽지만 그 전통이 아직도 유대인 사이에 지켜지고 있다면 예수님은 이런 식의 축사를 했을 것입니다. Blessed are you, Lord our God, king of the universe, who brings forth bread from the earth. 땅에서 떡을 내시는 우주의 왕 우리의 하나님 주님을 송축합니다. 짧지만 여기에는 그들의 신앙 고백이 담겨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라는 것과 우주의 왕이시라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지으신 땅을 축복하시어 거기서 우리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나온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래서 저도 분주한 식당에 가면 긴 기도를 하기보단 간단하게 이렇게 기도합니다. Bless the Lord, our God, who gives food from the earth he created. Amen 아직 예수님이 하셨을 법한 축도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아니 벌써 끝났어?라고 의아해 하지만 짧은 식사 기도는 어디 가나 환영을 받습니다. 여러분들도 꼭 그렇게 하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리고 먹은 후에 남은 떡을 모아서 12광주리를 채웠다고 했습니다. 4복음서 모두 12광주리를 거두었다고 했으니까 아마도 그 숫자는 확실한 것 같은데 왜 하필이면 12광주리라고 구체적으로 기록을 했을까요? 어떤 학자들은 아마도 12 사도들이 집에 있는 가족들에게로 가져갈 수 있도록 한 것이 아닐까하고 추측을 합니다. 그런데 모인 사람들이 이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강제로 왕으로 삼으려고 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메시아로서의 역할을 분명히 이해했습니다. 정치적 혹은 군사적 반란을 일으켜 로마제국을 정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임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를 왕으로 만들려는 군중을 피하십니다. 혼자서 산에 가시죠. 이제 제자들만 남아서 예수님이 언제 오나 저녁까지 기다렸는데 예수님이 안오시는 거예요. 그래서 제자들은 혹시 예수님이 베드로의 고향인 가버나움에 혼자 가셨나 해서 배를 타고 가버나움으로 가는 중입니다. 그런데 풍랑이 일기 시작한 겁니다. 낮에는 뜨겁다가 밤에는 기온이 갑자기 떨어지면서 산에서 내려오는 찬 공기가 바람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비록 갈릴리가 호수지만 풍랑이 자주 일어난다고 합니다. 그 풍랑속에서 열심히 노를 저어보지만 바람을 가슴에 안고 노를 젓는지라 도데체 앞으로 나가질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쪽에 보니까 유령 같은 사람이 물 위를 걸어오고 있는 겁니다. 제자들이 얼마나 놀랬겠습니까? 아마 비가 줄줄 내리는 한 밤중에 하얀 옷을 입은 처녀 귀신을 만난 것처럼 등골이 오싹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야 나. 무서워하지 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에 태웠는데 그러자 마자 바로 제자들이 가고자 한 가버나움에 배가 도착했다는 사실을 마지막으로 오늘 말씀이 끝납니다. 우리는 사건이 일어난 후 2천년이 지나서 믿음으로 성경을 읽으니까 이제는 놀라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니까 그런 기적은 당연한 것 아니냐라는 것이죠. 그렇죠? 창세기 1장 1절이 믿어지면 이정도는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의 군중들과 제자들의 입장을 생각해 보세요. 로마제국의 횡포와 압제아래 이제나 저제나 이스라엘을 해방시켜줄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온갖 기적을 행하는 예수님을 강제로 왕을 삼으려고 했는데 오히려 예수님은 이제 자신도 아니고 제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려 하십니다. 여기에 우리의 할 일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뚝딱 전 세계의 모든 권세를 하루 아침에 물리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수도 있습니다. 만약에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이룰 생각이셨다면 예전에 그렇게 하셨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손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물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나 제자들이 행한 기적을 할 수 없잖아요?” 정당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기적은 다만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려주기 위한 수단이었지 그 자체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는 수단은 아니었습니다. 기적이 아니라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유대인 대신 자기 목숨을 기꺼이 내 주었던 맥시밀리안 콜비 같은 목사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기적이 아니라 전도하려던 원주민에 의해 죽임을 당한 짐 엘리옷 같은 선교사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기적이 아니라 교회를 통해서, 우리 실로암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기를 원하십니다. 여기에 저는 여러분과 함께 그런 교회를 만들어 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