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06일 주일 설교 Sean Chang, 10월 6, 20243월 27, 2025 오늘 본문 말씀에는 두가지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나 시간상 두가지 다 다룰 수는 없고 오늘은 이혼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겠습니다. 교회에서 이혼 문제를 다루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이혼율이 상당히 높은 현대 사회에서 점점 교회는 이혼의 문제를 다루는 것을 꺼려합니다. 목회자에게도 상당히 부담스러운 topic입니다. 그러나 오늘 topic은 제가 선택한 것이 아니고 lectionary에 의해 정해진 것이기 때문에 평소에 하던 대로 lectionary를 따라가겠습니다. 그래서 다소 부담이 되시더라도 용서하시고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이혼이라는 주제가 쉽지 않은 이유는 여기에는 성경에서 말하는 원칙이 있고 그와 반면에 우리가 부딪치는 현실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목회자로서 그리고 교회로서 돌봄의 문제가 있습니다. 원칙이라는 것은 성경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이혼은 안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천주교에서는 이혼을 금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혼한 사람은 천주교 교회에서 다시 결혼할 수 없습니다. 개신교에서도 원칙적으로는 이혼을 금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돌봄의 차원에서는 또 천주교도 개신교도 예외를 둡니다. <ppt 통계> 그리고 우리에게는 또 현실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1970년대에 이혼율이 50%라는 절정에 도달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그 당시의 통계 방식에 문제가 있기는 했습니다. 좀 더 정확한 통계 조사는 결혼한지 20년 안에 이혼한 숫자를 비교하는 것인데 이 방법에 의하면 50%는 아니고 약 40%가 20년 안에 이혼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1970년도의 절정에서 그 이후 현재까지 매년 실제 이혼율이 점점 낮아지고 있는 추세입니다. 그리고 교육 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그리고 수입이 높아짐에 따라 이혼율은 점점 떨어지고 있습니다. 어떤 통계는 대학을 졸업하고 25세 후에 결혼한 사람들의 이혼율은 19%라고 합니다. 이것은 크리스찬 이든 아니든 모든 사람들을 포함한 수치니까 아마도 크리스찬만 계산한다면 이보다 더 낮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현대 교회가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를 말하기 전에 우선 본문부터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트집을 잡으려 이렇게 물어봅니다. <ppt>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우리 번역에는 “버린다”는 표현이 사용되었지만 원문의 뜻은 “send away” 즉 보내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옛날식으로 말하자면 친정으로 되돌려 보내는 것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오늘 본문 내용이 마태복음 19:3에도 나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는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ppt>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그냥 이혼하는 것이 아니라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겠지요. 그런데 이 표현이 좀 애매모호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영어 번역이 좀 더 분명합니다. <ppt>Is it lawful for a man to divorce his wife for any and every reason? 즉 어떤 이유라도 이유가 있으면 남자가 아내를 이혼할 수 있느냐고 물어보는 것입니다. 물론 바리새인은 이에 대한 답을 알고자 신실하게 물어보는 것은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특정한 상황에서는 이혼을 인정했는데 그 특정한 상황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질문이 나오게 된 율법이 신명기 24장 1절에 나옵니다. <ppt>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여기에 이 “수치되는 일”에 대해 유대인들의 해석이 달랐습니다. 좁게 해석하는 랍비는 간음이라고 해석하고 넓게 해석하는 랍비는 그 범위를 넓혀 어떤 것이든 남편이 흠을 잡을 수 있는 것은 “수치되는 일”이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바리새인들의 질문은 정작 이에 대한 답을 알고자 물어보는 것은 아닙니다. 뭔가 꼬투리를 잡으려는 의도인데 이 질문을 한 배경에는 헤롯 왕의 이혼이 있습니다. 지난 번에 말씀드렸듯이 헤롯 왕이 왕비와 이혼을 하고 형의 아내인 헤로디아와 결혼을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이혼에 대해서 침례 요한이 강하게 비난했다가 사형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은 혹시 예수님도 헤롯 왕의 심기를 건드리는 말을 하지 않을까 해서 물어보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ppt>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것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이 무엇이냐라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자세히 나와있지 않지만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두 사람을 짝지어 주셨다, 즉 결혼을 시키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결혼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입니까? 여러분은 결혼하기 전에 하나님께 여러분의 배우자에 관해서 그리고 결혼에 대해서 기도해 보신 적 있습니까? 청춘 남녀가 라스베가스에 가서 $10주고 (아니 지금은 가격이 올라서 $65이라고 합니다) 결혼식을 하는 것이 하나님이 짝지어 준 것입니까? 약혼하고 예물 문제 때문에 파혼하는 그런 것이 하나님이 짝지어 준 것입니까? 예수님이 말하는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은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예수님이 말하는 결혼이란 유대 전통에 깊이 뿌리 박힌 신실한 모든 절차를 거치는 그런 결혼을 말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결혼은 두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의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양가의 허락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양가의 허락이 있어도 바로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1년이라는 정혼 기간이 있습니다. 그동안 남편 될 사람은 새 부부가 거처할 장소를 마련하고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합니다. 그리고 온 동네가 결혼식에 초청되어 며칠 간의 결혼식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양쪽 집안의 허락 아래 오랜 시간에 걸쳐 기도하면서 준비하고 많은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하는 부부가 하나님이 짝지어 주었다고 좀 더 확신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저는 모든 결혼이 하나님이 짝지어 준 결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천주교에는 이혼을 인정하지 않지만 annulment라는 절차가 있습니다. 결혼 자체를 무효화하는 절차인데 즉 그 결혼은 하나님이 짝지어 준 것이 아닌, 그래서 처음부터 결혼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교회가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결혼이니까 이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또 하나님이 짝지어 준 결혼이 아닌 것 같다고 해서 이혼을 서두르는 것도 크리스찬으로서 성급하게 취할 행동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미 있는 결혼을 sanctify 즉 성화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나중에 제자들에게 이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을 하십니다. <ppt>누구든지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에 장가 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 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 그러면 재혼한 사람들은 모두 간음을 행하는 것입니까? 아까 유대인들도 천주교도 개신교도 예외라는 것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마가복음 본문에는 나오지 않지만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는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을 하십니다. <ppt>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라 바람 피우는 배우자는 예외라는 것입니다. 바람피는 배우자를 언제까지 용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릴 수 있습니까? 평생 바깥으로 돌아다니다가 죽을 때가 되어서 집에 돌아오는 남편을 회개 시키고 하나님을 영접하게 했다는 신앙 간증을 많이 들어봤습니다. 물론 그 분들은 이를 통해서 또다른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체험하고 중생을 경험하게 했으니 그것도 크나큰 은혜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믿는 사람 모두가 순교자가 될 수 없는 것처럼 그분들에게 이런 것을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abuse하는 남편은 어떻습니까? 여자에게 손찌검을 하는 xxx들처럼 비겁하고 쪼잔한 남자들은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런 xxx들이 있습니다. 오죽이나 못났으면 화풀이를 여자한테 합니까? 얼마큼 여자들이 참고 기다려야 합니까? 물론 그런 남편들도 참고 기다리고 기도한 결과 남편이 회개하고 돌아왔다는 간증도 많이 들었습니다. 할렐루야! 그러나 모든 아내가 순교자가 되기를 바라십니까? 모든 상황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참을 수 있을 만큼 참아야 합니다. 그러나 특수한 상황 아래서는 이혼이 최선의 방법일 수 있습니다. 영국에서 어떤 유명한 여배우가 또 다른 유명한 남자 배우와 결혼을 했습니다. 둘 다 한 성격하는 터이라 그들의 결혼 생활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이혼을 하지 않았습니다. 남편이 죽고나서 어떤 사람이 그 여배우에게 물어봤답니다. 이혼을 생각해 본 적 있어요? 그랬더니 그 배우가 이렇게 답하더랍니다. “Divorce? Never. But murder often!” 이혼? 한번도. 그러나 죽이고 싶은 마음은 자주! 살인보다는 이혼이 그래도 낫지 않겠습니까? 결론 <ppt DivorceCare>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아는 크리스찬들은 결혼이 그런 파국에까지 가지 않도록 가정을 세우는 일에 노력해야 합니다. 가정은 꽃밭과 같아서 그냥 놔둔다고 스스로 아름다운 꽃밭이 되지는 않습니다. 가꾸어야 합니다. 노력해야 합니다. 시간을 투자해야 합니다. 지금 이혼을 생각중인 사람들은 정말 신중하게 최선을 다해서 결혼을 살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최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혼을 하게 되는 경우라면 교회는 이를 판단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 사람의 상황이 되어보지 않고는 아무도 함부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이혼은 단란해야 할 한 가정이 찢어지는 것입니다. 이혼하는 두 사람에게도 아이들에게도 커다란 마음의 상처가 됩니다. 여기에는 승리자가 없습니다. 생활의 패턴이 바뀌고 가구가 바뀌고 집이 바뀌고 아이들은 학교가 바뀝니다. 불안한 환경안에서 아이들이 방황할 수 있습니다. 재정적인 타격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오는 정서적 trauma는 엄청납니다. 그래서 오히려 교회는 그분들을 정죄하기 보다 이해하고 돌봐야 합니다. 그래서 힘들고 짐 진 자들이 교회에 와서 주님이 주시는 안식을 경험해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공지사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