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29일 주일 설교 Sean Chang, 9월 29, 20243월 27, 2025 오늘 본문 말씀은 많은 토픽을 다루고 있습니다. 우선은 요한이 다른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보고 하지 말라고 했다고 예수님께 말을 합니다. 어쩌면 예수님이 직접 선택한 제자들이니까 자기들은 예수님의 inner circle, 즉 측근에 속했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제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무슨 특권이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는 꼴을 못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또 한편 제자들의 시기심이 담겨있습니다. 이전에 자기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려 했다가 실패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귀신을 쫓아낸 것입니다. 질투가 났을까요? 그 사람보고 우리 스승인 예수님의 이름을 함부로 팔지 말라고 했습니다. 과연 이 제자들은 자신의 이기심을 위해서 그렇게 말을 했을까요? 아니면 진짜 예수님을 위해서 그런 말을 했을까요? 문맥상으로 봐서 전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이 그렇게 속 좁은 생각하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ppt>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물론 상식적인 말입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는 바로 예수님을 반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뒷배경을 조금 깊이 살펴보면 이 사람은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는 예수님의 이름을 빌어 귀신을 쫓아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당시에 돌아다니며 마술을 하는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시험 삼아서 예수님의 이름을 팔아서 귀신을 쫓아내려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자신들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이 그런 기적을 행하니까 자기들도 한 번 시도해본 것입니다. 과연 “예수 이름으로”라는 주문이 귀신들에게 통할까? 그래서 귀신에게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ppt>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 “내가 믿는 예수님을 의지하여”-도 아니고,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라고 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 악귀가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ppt>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넌 누구냐 그 악귀한테 신나게 얻어터지고는 발가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했다는 이야기가 사도행전 19장에 나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만 팔아서 귀신을 쫓아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 등장하는 이 사람은 분명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일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 주위에 열 두 사도밖에 없다고 생각하지만 비록 이들 서클에는 들어오지 못했지만 그 외에도 예수님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ppt>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성경을 가까이 하시는 분들 중에는 마태복음 12장 30절에 반대의 구절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ppt>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이 두 이야기의 배경이 다릅니다. 마태복음 12장 30절에 나오는 말씀의 배경은 예수님이 지금 귀신을 쫓아내셨는데 바리새인들이, 즉 예수님을 배척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귀신의 왕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낸다고 공격을 한 상황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비록 열 두 명의 제자 서클에 속한 것은 아니지만 이 사람은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으로서 믿음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좋은 일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ppt>너희가 열 두 제자로서 무슨 특권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래, 나중에는 모두 다 순교하는 특권을 누리겠지만, 물론 그들에게 직접 말하시지는 않았지만, 또 순교의 영광을 누리지 않을 사람들에게도 귀신을 쫓아내는 특권이 주어졌으니까, 그들과 싸우지 말고 평화롭게 지내야지. 그리고는 바로 이어서 물 한 그릇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것이 앞의 사건과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문맥상으로 봐서 앞의 이야기를 끝내고 이제 다른 주제를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5,000개가 넘는 희랍어 원문은 마침표도 없고 띄어쓰기도 없고 해서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잘 분간이 가지 않습니다. <ppt 희랍어 성경 원본> 다행히 옛날 희랍어에 능통한 학자들이 분석하고 연구해서 내어 놓은 결과가 우리가 지금 보는 성경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번째 topic은 예수님에게 속한 자에게 주는 물 한 그릇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ppt>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여기에 “물 한 그릇”이 나오는데요. 그 당시에는 물이 참 귀했던 때였습니다. 지금처럼 수돗물이 좔좔 나오는, 그리고 마켓에서 생수를 24병씩 사올 수 있는 그런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멀리서 물을 길어와야 했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이 겨우 나그네에게 줄 수 있었던 것은 “물 한 그릇”이었습니다. 2주 전인가요, 우리 교인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식당 사장 와이프가 아내에게 꼬깃꼬깃 구겨진 봉투를 하나 주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얼마 안되지만 정말 교회에 헌금하고 싶어서 드리는 거니까 꼭 받아주세요.” 지금 사업도 어려울텐데 우리는 받을 수 없다고 거절을 했는데 한사코 주머니에 넣길래 어쩔 수 없이 받아왔습니다. 금액으로는 정말 얼마 안되는 돈이었습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정말 큰 헌금이라고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만났을 때 제가 정중하게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어려우실 텐데 이렇게 헌금을 해 주셔서 정말 너무 감사했습니다. 꼭 필요한 곳에 쓰겠습니다.” 그러니 제가 헌금을 아무데나 허투로 쓸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어려운 가운데 정성껏 드리고 싶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헌금을 먹고 마시는데 쓸 수 있을까 말입니다. 매주 음식을 준비하는 저의 아내는 지금 눈을 굴리고 있겠지만 저는 목회자의 양심으로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성경에 기초한 헌금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습니다. 저는 십일조를 강조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구약의 레위 지파, 즉 땅의 지분이 없었던 성직자들을 위해서 만든 제도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어떤 분들은 지금 목사가 그 성직자의 후예라고 주장하시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후에 성전이 무너졌고 그로 인해서 성직자 계급이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신약성경 전체를 통해서 성직자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안습니다. 다만 베드로서에 “거룩한 제사장”이라는 말이 나오지만 그것은 우리 크리스찬 모두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초기 기독교 역사에도 구약적 제사장 혹은 성직자가 다시 come back했다는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성직자가 다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몇 세기 후의 일입니다. 따라서 저는 십일조가 교회에 주어진 하나님의 계명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여러분의 마음에 허락하시는 만큼 잘 버는 사람은 많이 내고 적게 버는 사람은 적게 내고 또 사정이 어려운 분들은 내지 않으셔도 됩니다. 세금 악착같이 거두는 미국 정부에서도 극빈자에게는 세금을 거두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꼭 필요한 비용은 여러분이 부담하는 것이 신약 성경적입니다. 그리고 가난한 자와 선교사들을 위해서 특별 헌금에 참여하시는 것도 성경적입니다. 여기에도 마음이 감동받는 대로 여유가 있는 분들은 많이 내시고 여유가 없는 분들은 안 내셔도 됩니다. 전혀 안내는 것이 부담스럽다고 생각하시면 $1 내시면 됩니다.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우리 교회처럼 작은 교회에서 조동천 선교사의 의료비를 위해서 거의 1/3의 비용을 보낼 수 있었다는 것이 목사로서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물 한 그릇”을 이야기하다가 헌금 이야기가 나왔네요. 오늘 본문을 계속해서 보겠습니다. <ppt>“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지난 주 본문에서 예수님이 어린이를 앞에 세우고 안아주며 이 작은 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나를 영접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린이를 앞세운 것은 꼭 어린이한테만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가 상징하는 힘없고 약한 사람들을 영접하라는 주제를 계속 연결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사회적으로 작은 자의 취급을 받는 그런 사람들을 stumble, 즉 실족, 다시 말해서 헛발을 딛게 하는 자는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메고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낫다고 하십니다. 특히 유대인에게는 다른 사람이 헛발을 딛게 한다는 표현에 믿음에서 멀어지게 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혹시 우리의 언행으로 인해 사람들로 하여금 믿음 생활에서 멀어지게 한 경험이 있습니까? 급히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ppt 연자 맷돌> 그리고 또 손이나 발, 눈이 죄를 짓게 하거든 잘라버리고 파버리라고 극단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유대인의 전통에는 자기 몸을 스스로 상하게 하는 것은 죄악이라고 가르쳐왔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실제로 팔 다리 자르고 눈을 파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만약 저 아랍권 문화에서처럼 도둑질 했다고 손을 잘라버리고 남의 여자 훔쳐봤다고 해서 눈을 파버리면 얼마나 끔찍한 사회가 되겠습니까? 다만 중요한 점을 강조하기 위해 당시에 사용하던 과장법을 예수님이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 소망을 두기 보다는 하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하늘 나라의 시민으로서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들을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적어도 “너 때문에 교회 안나가”라는 소리를 들으면 안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