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22일 주일 설교 Sean Chang, 9월 24, 20249월 24, 2024 오늘 설교 제목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를 영접하라”입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자신이 십자가를 져야 할 때가 왔다고 세 번을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두번째 이야기입니다. 지지난 주에 예수님이 사람들을 피하여 두로에 가셨다가 이방 여인을 만난 사건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그 이방 여인에게 개라는 모욕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재치 있는 믿음의 답을 하는 바람에 그 여인의 귀신 들린 딸 아이를 고쳐준 이야기입니다. 걸어서 하루 길인 이방 지역 두로까지 가신 이유는, 갈릴리 호수를 중심으로 지난 3년간 하셨던 사역을 마무리 짓고, 앞으로 닥칠 십자가의 고난을 준비하시고, 제자들에게 이를 가르치려고 멀리 MT까지 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별 효과가 없었습니다. 거기서도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시 갈릴리로 내려오시는 중입니다. 오는 도중에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그러면 안된다고 예수님을 꾸짖다가, 오히려 호되게 혼이 납니다. 그리고 계속 내려와서 이제 갈릴리에 있는 가버나움, 그러니까 사역의 headquarter 역할을 했던 베드로의 집이 있는 곳으로 내려오시면서, 두번째로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장면이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며칠 전에 예수님이 자신이 져야 할 십자가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은 내려오면서 서로 자리 다툼을 합니다. 물론 마가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도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깨닫지 못한 것은 그렇다 치고 왜 묻기도 두려워했을까요? 원래 제자와 스승 사이는 특별한 관계입니다. 혼줄이 날 지언정, 제자들은 스승에게 아는 척 하지 않고 서슴없이 물어보는 것이, 제자와 스승 사이에서 있어야 하는 신뢰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제자들이 묻는 것조차 두려워했다고 했습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십자가의 도를 말씀하셨는데 아직은 제자들이 그 십자가를 질 준비가 안되었는지 모릅니다. 혹시나 말 잘못했다가 그 십자가에 말려들어가는 것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서야 모두가 순교를 무릅쓰고 전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중 일이고, 지금은 십자가 이야기는 뒤로 하고 자기들끼리 서열 싸움을 벌입니다. 그 당시의 사회 풍조가 자기의 체면과 사회적 위치를 가장 중요시했던 점을 생각해보면, 제자들의 행동이 이해가 전혀 안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은 자신에게 일어날 끔찍한 일을 말씀하고 계시는데, 이에 대한 준비는 커녕 자리 다툼을 하고 있으니, 예수님이 실망의 한 숨을 쉬셨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가버나움에 도착하신 후, 열두 제자를 불러놓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네들 내려오면서 너희들끼리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내가 아는데, 잘 들어.”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시대를 막론하고 상대방을 밟고 올라서야 정상에 오르는 치열한 삶의 전쟁이 사회 풍조입니다. 그런데 첫째가 되려면 뭇 사람의 끝이 되라구요? 이게 말이 됩니까? 치열하게 경쟁해서 이겨도 정상에 올라갈 지 못 올라갈 지 모르는데 꼴찌가 되라니요? 갑질 당하는 것이 지긋지긋해서 나도 성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갑질을 해야겠다고, 오직 성공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짓밟아야 하는데 다른 사람들을 섬겨야 한다구요? 세상의 지혜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말씀입니다. 그럼 예수님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걸까요? 물론 예수님의 말씀은 하늘 나라에서의 서열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서의 서열 상 첫째가 되려면 지금 이 땅에서는 다른 사람들을 앞세워주고 섬겨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만약에 하늘 나라에서의 서열이 그렇게 정해지는 것이 확실하다면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그 하늘 나라가 잘 보이질 않습니다. 지금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은 오늘 내가 이 치열한 경쟁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가의 질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는 것에 소망을 두고 삽니다. 모든 것이 사실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면 믿음이라는 것이 왜 필요합니까? 믿음이라는 것은 눈에 당장 보이지는 않지만 그럴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ppt a child>그리고 예수님은 그 본보기로 어린이를 세우십니다. 예수님이 어린이를 세운 것은 지금처럼 어린이를 특히 높이고 대우해주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래서 spoil되어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나약한 어른이를 만들라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처럼 나약하고 힘없고 권력도 없고 남에게 의존해야만이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을 영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ppt>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아이들처럼 약한 그런 사람들을 영접하라는 말씀입니다. 영접하는 사람은 곧 예수님, 그리고 나아가서 하나님을 영접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중세 때 몰락해가는 수도원이 하나 있었습니다. 한때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수도원이 북적거렸던 때도 있었지만, 무슨 이유에서 인지 숫자가 점점 줄더니 이제 마지막 5명만 남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문을 닫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로 고민을 하고 있던 중, 한 수도승이 근처에 있는 랍비를 찾아갑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잠잠히 듣고 있던 랍비가 이상한 말을 합니다. “당신들 중에 메시아가 있소.” 이 수도승은 돌아오면서 그 랍비가 한 말을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 중에 메시아가 있다? 분명히 나는 아닐테고 그럼 토마스? 토마스는 맨날 늦게 일어나는데? 그럼 마크? 마크는 술을 좋아하잖아? 그럼 안드레아? 안드레아는 그리 똑똑한 것 같진 않은데… 그럼 제임스? 수도원에 쌀도 떨어져 가는데 제임스는 너무 많이 먹어. 그럼 누구지? 그 수도승은 돌아와서 나머지 4명에게 랍비가 한 말을 전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모두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설마 우리 중에? 에이, 랍비가 잘 못 본 거겠지.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평소에 서로 막 대하던 수도승들이 서로를 존중하기 시작했고 서로를 위하여 양보하고 봉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누가 진짜 메시아인지 모르기 때문에 모두에게 잘 대해주기 시작했습니다. 이 소문이 사람들에게 퍼졌습니다. 저 수도원에 있는 수도승들은 서로를 메시아처럼 받들고 섬긴대. 그런 수도원이라면 나도 한번 가볼까? 점점 사람들이 늘기 시작했고 그 수도원은 옛날의 활기를 되찾았다고 합니다. 만약에 제가 우리 중에 예수님이 있다고 하면 믿으시겠습니까? 그러면 예수님 당시의 어린이처럼, 아무런 지위도 없고, 능력도 없고, 그냥 다른 사람에게 짓밟히고, 복종하며 살아야 했던 그런 사람들을 품는 것이 예수님을 품는 것이라고 말씀드리면 믿으시겠습니까? 그렇게 하실 수 있겠습니까? 왜 예수님은 유대교의 중심인 예루살렘이나 문화의 중심인 로마에서 사역하지 않으시고 갈릴리 호수를 둘러싼 어촌 마을에서 가난에 찌든 사람들과 같이 하셨을까요? 저는 원래가 내성적이라 잘 모르는 사람과 어울리거나 말 섞는 것도 꺼려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하나요? 목사가 되다 보니 지금 교회에 안다니는 사람들도 많이 만나게 됩니다. 처음에는 잘 몰랐는데 이야기를 듣다 보니 저마다 상처가 있고 가정에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아픈 사람이 있고 쉽게 풀리지 않는 관계의 문제, 재정상의 문제 등등, 문제가 없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소망이 없이 살아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뭐 그전에도 머리로는 모두가 그런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상상은 했지만 전혀 내 마음에 와 닫지 않았었는데, 그런 사람들과 마주 앉아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것이 현실이라는 것이 마음에 느껴졌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ppt>“수고하고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그런데 예수님은 그 일을 교회에 맡겨놓고 혼자서 하늘로 올라 가버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일을 떠맡게 되었습니다. 어떤 분은 “예수님이야 능력이 많으시니까 얼마든지 그렇게 말하실 수 있지만 우리는 그게 아니잖습니까?”라고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감리교회에서 스데반 사역 훈련을 6개월간 받았습니다. 스데반 사역이란 갑자기 남편이나 아내 혹은 자녀를 잃고 아니면 다른 우리 일상생활에서 겪을 수 있는 트라우마를 경험한 사람들을 돕는 사역입니다. 그런데 그 사역이란 특별히 다른 것이 아니고 일주일에 한 번 그 사람들과 일대 일로 만나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의 일을 해결해주는 사역이 아닙니다. 그냥 같이 있어주고 선입관 없이 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적절한 때에 희망의 말로 위로해 주는 것입니다. 교회나 신앙 이야기는 본인이 먼저 말을 꺼내기 전에는 거의 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정상 생활을 할 수 있는 정도로 회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6개월일지 12개월일지 개인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 주위에는 당장 해결할 문제를 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우리가 도울 수 있는 만큼 도와야지요.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런 일을 당하면서 무너진 자아를 회복하고 사라진 희망을 다시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과 마주 앉아서 판단하지 않고 그들의 속 사정 이야기를 그냥 들어주는 것. 어쩌면 이것이 그들로 하여금 다시 평안을 되찾을 수 있게 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그것이 우리가 예수님에게서 받은 평안, 그 평안을 은연중에 나누어 주는 것인지 모릅니다. 교회는 수고하고 짐 자들이 와서 마음의 쉼을 얻는 곳입니다. 이제 저는 생각합니다.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저를 부르신 것이라고. 교회를 성장시켜서 비까번쩍한 교회당 짓고, 웅장한 오케스트라 대동하고 최신 장비를 동원하여 인터넷에 올려도 전혀 꿀리지 않는 프로덕션의 예배가 아니라, 미국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여 서로 다독거리고, 도와주고 사랑하며 삶을 나누는 교회를 세워가라고 저를 부르셨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여러분들도 그런 꿈을 가지고 사역에 동참하여 같이 아름다운 교회를 만들어 가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