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15일 주일 설교 Sean Chang, 9월 17, 20249월 17, 2024 오늘 설교의 주제는 “십자가의 도”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십자가의 도. 그 시작은 베드로의 고백입니다. 너무도 잘 아는 구절이지만 새로운 각도에서 오늘 본문을 보겠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공관 복음서 즉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만 나옵니다. 이 베드로의 고백이 있은 후 예수님은 이제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처음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8장 27 절부터 38절 말씀입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이 총 16장이니까 오늘 본문은 마가복음의 딱 중간입니다. 그래서 갑자기 생각나는 것이 있어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어디쯤 이 이야기가 나오는가 찾아봤습니다. <ppt 예수님이 죽음에 대해서 처음으로 말씀하심> 그랬더니 마태복음은 총 28장인데 16장에서 처음으로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딱 중간은 아니지만 거의 중간입니다. 누가복음은 총 24장인데 9장에서 처음으로 죽음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중간에서 조금 앞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총 21장인데 12장에서 예수님이 처음으로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이 4복음서에서 볼 수 있는 공통점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각 복음서의 반 이상을 예수님의 마지막 2-3주간 죽음을 준비하시는 것과 부활하심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의 3년간의 사역에 대해서는 앞의 반에서 다루었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이 복음서의 가장 핵심 주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교회에서 점점 십자가가 사라지고 있다는 불길한 소문이 들립니다. 더 이상 끔찍한 십자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꺼려합니다. <ppt 십자가의 도> 그러나 바울 사도가 말했듯이 세상사람들에게는 십자가가 조롱거리지만 크리스찬들에게는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십자가가 없는 예수님은 없습니다. 부활이 없는 예수님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책을 읽어야 예수님의 실체에 대해 올바른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의 말만 듣고는 예수님을 수박 겉핥기식으로 밖에는 알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당시 사람들과 하다못해 제자들도 예수님의 실체에 대해 오해를 했듯이 오늘날 사람들도 그저 소문이나 다른 사람들의 말만 듣고 예수님을 오해합니다. <ppt> 유대인 해방 운동하다가 젊은 나이에 요절한 사람. <ppt> 4대성인중의 한 사람. <ppt> 종교가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 그러나 우리는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이 예수님의 실체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다른 사람들의 말만 듣고 오해를 한 경우가 있습니까? 제가 다른 교회에서 전도사직을 하고 있었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 그날 예배 일정이 모두 끝나고 집에 오고 있는데 어떤 여자 찬양팀 멤버중의 한 사람한테 전화가 왔습니다. 그날 전화의 목적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대화 도중에 담임목사 사모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이야기인 즉슨 사모가 운영 위원도 아니면서 운영 위원회에 들어가서 이러구 저러구 회의를 자기 맘대로 휘두르려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듣고 있다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제가 전도사로서 매달 하는 운영 위원회에 모두 참석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한번도 사모님이 운영 위원회에 들어온 적이 없는데요? 아니 누가 그런 소리를 합니까?” 그랬더니 그 분이 그럽니다. “누가 누가 그러는데 한 두 사람이 아니예요.”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그건 오해입니다. 사모님 운영위원회에 한번도 들어온 적 없습니다.” 그랬더니 이 분이 갑자기 화를 버럭 내면서 저한테 쌍시옷 욕을 퍼붓더라구요. “야, 이 xxx야. 니가 뭔데 날 가르치려고 들어?” 사실을 말해주다가 뜬금없는 욕을 바가지로 먹으면서 이건 웃을 수도 없고 화를 낼 수도 없고, 그래서 전화를 그냥 끊어버렸습니다. 결국은 그 분은 교회에 오래 있지 못하고 다른 교회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 다른 교회에서 만나도 저를 피했습니다. 본인한테 직접 확인하면 간단히 끝나는 일을 확인도 하지 않고 큰 오해를 하고 있었던 겁니다.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겠지만 다른 소소한 일부터 밉상이 꼽히니까 남이 하는 소리를 확인도 해보지 않고 그대로 믿어버린 겁니다. 저는 그것이 늘 마음에 걸렸습니다. 제가 잘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분은 갑자기 그렇게 저한테 욕설을 퍼붓고 얼마나 후회를 했을까 얼마나 저를 대하기가 껄끄러울까 해서입니다. 제가 목회를 하겠다고 결심했을 때 그런 껄끄러운 문제는 모두 해결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교회에서 한 번 만났을 때 일부러 다가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서로 그리 좋지 않게 끝났지요? 조만간 한 번 만나서 서로 안 좋은 감정 풀어야지요.” “네 그래요.”하고 그분이 답을 했는데 그후로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영향을 받아서 소문만 듣고 예수님에 대해 많은 오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뭐라고 하느냐고 물었을 때, 아마도 제자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하는 모든 이야기를 전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특히 바리새인이나 제사장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 법을 무너뜨리는 자, 바알세불에 속한 자 등등, 안 좋은 소리도 있었겠지만 그런 것은 다 빼고 세례 요한, 엘리야, 혹은 선지자라고 한다고만 말을 했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정말로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는 지 알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 다음에 제자들에게 질문을 하기 위한 introduction이었습니다. <ppt>“그래, 사람들은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것이 진짜 제자들에게 하고 싶었던 질문이었습니다. 앞으로 자신에게 일어날 일들에 대해 말해주어서 마음의 준비를 시켜야 하는데 그전에 제자들이 과연 자기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으셨을까요? 수많은 군중이나 처음부터 꼬인 마음을 갖고 있던 바리새인이나 제사장들과 달리 그래도 지난 삼년간 같이 먹고 자고 전도 여행을 하면서 밤에는 가르쳤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직접 나를 겪은 너희들이 과연 나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을까? 어쩌면 예수님은 그에 대한 답을 이미 알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다만 모든 제자들에게 입으로 시인하게 하여 확실히 짚고 넘어가고 싶으셨는지 모릅니다. 여기에서 베드로가 제자들의 대표로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ppt>“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예수님의 성이 아니라 메시아라는 희랍어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하니까 마치 예수가 이름이고 그리스도가 성씨인가 오해를 할 수도 있는데 그것이 아니고 예수 메시아라는 뜻입니다. 그럼 예수님의 성은 무엇이었을까요? 네. Trick question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지금 우리처럼 성씨를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성씨가 없이 이름 뒤에 그 사람을 구별할 수 있는 다른 수식어를 사용했습니다. 예를 들면 서울에서 온 철수, 같은 동네에서는 갑동이의 아들 철수, 아니면 목수 철수, 그런 식으로 불렀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나사렛 예수라는 이름을 많이 들어 보셨을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를 때는 메시아 예수,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기름부음을 받은 예수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베드로의 이 고백을 들으시고 이제 예수님이 비로소 십자가와 부활을 말씀하십니다. 비록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는 유명한 고백을 했지만 예수님이 죽임을 당한다는 말을 듣고는 안색이 변했습니다. 아니!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메시아. 적어도 그 메시아는 이제 혁명을 일으키고 로마 제국을 무너뜨려 이스라엘의 영광을 되찾을 사람이라고 베드로는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죽임을 당하신다고? 자기가 기대했던 메시아와는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적인 생각에 예수님을 붙들고 그러시면 안된다고 항변을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아주 강하게 말씀을 하십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우리 한글 성경에는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말할 때는 항변했다고 되어있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말할 때는 꾸짖었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희랍어 원문에는 이 두 단어가 같은 단어입니다. 영어로는 rebuke 즉 호되게 야단을 쳤다는 말인데 예수님이 귀신들을 쫓아낼 때 쓰셨던 단어와 같은 단어입니다. 베드로가 스승인 예수님에게 야단을 쳤다는 해석이 한국 사람 정서에는 안 맞아서 그런지 훨씬 약한 항변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그러나 원어를 보면 베드로도 예수님도 아주 강한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강하게 야단을 치신 것은 꼭 베드로 뿐만이 아니라 같이 있었던 제자들을 향해서도 강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마 그들도 메시아에게 바라는 것이 베드로와 같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지금은 적어도 미국에서는 크리스찬이 실제로 십자가를 질 일이 없으니까 이 구절을 은유적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마가복음이 쓰여질 당시에는 이것이 현실이었습니다. 마가복음은 특히 로마에 있는 이방인 크리스찬들을 위해서 쓰여졌다고 하는 것이 정설로 되어있습니다. 시기가 기원 후 60년대 초반 그러니까 베드로 사도가 로마에서 순교하기 바로 전에 쓰여졌다고 학자들이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 시기에 로마에서는 크리스찬에 대한 핍박이 아주 심했을 때였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은 그 당시에 크리스찬들이 직접 대면했던 현실이었습니다. 지금 로마 경기장으로 죽으러 들어가는 크리스찬들에게 이 말씀은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 나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듯이 나도 그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거야. 두려워할 것 없어.” 오해하지 마십시오. 내 자식이 십자가가 아닙니다. 내 남편이, 내 아내가 십자가가 아닙니다. <ppt the way of the cross> 그러면 오늘날 우리의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실제 십자가가 아니더라도 남을 위한 나의 희생입니다. 남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입니다. 한푼이라도 손해보지 않으려고 바득바득하기 보다는 남을 위해서 조금 손해보는 것입니다. 내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권리를 찾아주는 것입니다.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해 주는 것입니다. 나한테 잘못하고 섭섭하게 했더라도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위에 어려운 사람들에게 손길을 내미는 것입니다. 위로의 말을 해주고 필요하면 입히고 먹이고 재우고 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교회로써 해야 할 일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