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1일 주일 설교 Sean Chang, 9월 2, 20249월 2, 2024 원래 lectionary의 두번째 해에는 마가복음을 주로 읽는데 지난 몇주간은 요한복음을 읽었습니다. 이제 다시 마가복음으로 되돌아왔습니다. 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에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여들었다가 여기서 나오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살렘에서 보낸 사실 확인 사절단입니다. 오늘 사건의 무대는 갈릴리 지역입니다. 그런데 멀리 예루살렘에서 소문을 듣자 하니 예수라는 사람이 막 기적을 일으키고 이상한 소리를 해서 많은 사람들이 따라다닌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누리는 종교적 영향력과 또 로마 집정관과 적당히 타협해서 얻은 정치적 사회적 그리고 재정적인 기득권에 도전을 하는 이 사람에 대해 자세히 알고자 사람들을 보낸 것입니다. 그런데 와서 보니 예수님의 제자들이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지 않는 겁니다. “올치, 잘 됐다.”하고 예수님께 트집을 잡습니다. 여기에 “부정한 손”의 “부정하다”는 한자 단어는 몇가지 뜻이 있지만 여기의 “부정”은 정하지 않음 즉 깨끗지 않음을 말합니다. 왜 제자들에게 트집을 잡지 않고 애매한 예수님께 트집을 잡을까요? 그 당시에는 추종자들의 잘못을 꼬집는 것이 선생의 체면을 떨어뜨리고자 하는 방법의 하나였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요. 교회에서 교인이 잘못하면 목사가 욕을 먹습니다. 잘못 가르쳐서 그렇다구요. 전혀 근거가 없는 말은 아닙니다. 저도 가끔은 그렇게 말을 합니다. “아니, 교회에 다닌다며? 그 교회 목사가 누구야? 어떻게 가르쳤길래…” 그러나 개중에는 목사의 가르침과 전혀 상관없이 자기 멋대로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목사가 그런 사람까지 책임져야 합니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일단 교인이 잘못하면 그 책임은 그 교회의 목사에게 돌아갑니다. 이는 한 교회의 목사라는 직책에 따라오는 부수적 책임입니다. 그런 것을 각오하고 목사의 길로 들어서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 실로암 교회는 이렇게 교회를 욕 먹이고 목사를 욕먹이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맞습니까? 그런데요 교회에 실망한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90%는 교인이 문제가 아니라 목사가 문제더라구요. 그래서 목사가 바로 서면 90%의 교회 문제는 해결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잘 하겠습니다. 마가는 혹시 이방인 독자를 배려하여 이 “장로들의 전통”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장로들의 전통”이란 성경의 율법에서 파생된 엄청난 양의 말로 전해져 내려오는 전통을 말합니다. 이것은 한 개인의 삶을 완전히 control하기 위한 것인데 구속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한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전해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시장에서 돌아오면 꼭 물을 뿌린다고 했는데 물을 뿌린다는 것은 손을 씻는다는 것입니다. 장로들의 전통은 어느 정도까지 자세하게 그 법이 상세했는지 심지어 손을 씻는 방법까지도 명시해 놓았습니다. 손을 씻을 때는 물을 손에 붇거나 혹은 손목까지 잠기게 해야 하며, 얼마만큼의 물을 사용해야 하는지, 씻을 때 손의 위치는 어떠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그릇을 사용해야 하는지 까지도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럼 왜 손을 씻는 것이 성경에 의거한 규율이 되었을까요? 물론 우리도 아이들에게 밥 먹기 전에 손을 씻으라고 가르칩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아이들이 밖에서 흙 만지고 먼지 마시며 놀다가 집에 들어와서 씻지 않고 밥을 먹으면 그 모든 불결한 것과 혹시 돌아다닐지 모르는 병균까지도 같이 먹게 되니까 그렇습니다. 손을 씻는 것은 위생상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시장에 다녀온 후에 손을 씻는 것은 그 이상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시장에는 유대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도 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집에 오면 이방인들과 혹시라도 접촉이 있었을까 해서 그것을 씻어내느라 손을 씻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유대인의 선민사상, 선민사상은 좋게 표현한 것이고, 나쁘게 표현하자면 배타적인 우월감에서 발생한 전통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점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또 오늘 본문에 보면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는다고 했습니다. 이 전통도 사실 위생보다는 자기들의 성전 예배의 개념이 저변에 깔려 있습니다. 이 그릇을 씻는 전통은 유대백성의 Diaspora 그러니까 기원전 6세기경에 바빌론으로 포로로 끌려갔던 시기에 생겨난 전통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언젠가는 포로 생활을 끝내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성전 제사가 다시 시작될 터인데 그 때가 되면 집에서 사용하는 그릇들도 제사를 위해 사용될 것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전에서 예배에 사용되는 그릇들이 거룩함을 위해서 청결을 요구하듯이 집에서 사용되는 그릇들도 거룩함을 위한 청결이 필요하다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장로들의 전통이 다 나쁜 것일까요? 적어도 그 시작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장로들의 전통의 목적은 첫째, 매일 삶속에서 하나님 앞에 거룩하기 위한 기본적으로 지켜야 하는 규례였습니다. 그들의 전통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기 위한 분명하고 확실한 지침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 거룩하라고 하셨는데 그럼 어떻게 거룩해질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이렇게 이렇게 하면 되겠다하고 장로들이 답을 낸 것이 전통의 일부가 됩니다. 둘째, 이 전통은 주위의 강력한 이방 문화에서 유대인의 identity를 지키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장로들의 전통이 성을 둘러싼 말뚝 울타리나 철로 만든 울타리처럼 다른 민족의 영향력에서 유대인의 거룩함을 지키는 방편이라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이 장로들의 전통은 주로 Diaspora 기간에 생겨났는데 포로로 끌려가 이방 나라에서 그들의 문화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유대인들은 이방 문화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들의 삶의 방식을 지키려 나름대로 노력을 한 것입니다. 포로 생활에서 되돌아온 유대인들은 예수님 당시 할례, 안식일, 음식에 대한 법, 그리고 손을 씻는 의례가 그들로 하여금 타 이방 민족과 구별되는 하나의 영광의 배지로 여기고 살게끔 했습니다. 셋째,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질서를 창조하셨는데 따라서 인간이 하찮은 것까지라도 그 질서를 지킬 때 모든 일이 잘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전통을 머리카락을 가르듯이 정확하게 하기를 원했습니다. 물론 지금 우리에게는 그런 규례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이지만 유대인들에게는 이런 일상의 하찮은 일에서도 하나님에게 헌신함에 있어 눈에 보이는 의도적인 모습을 보이기를 원했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좋은 의도로 시작된 장로들의 전통이 나중에는 그 의도를 잊어버리고 사람을 정죄하는 기준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마치 앙꼬 빠진 찐빵처럼. 우리는 우리가 교회 생활을 하면서 세운 전통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우리 한국 교회가 세운 특이한 전통이 있습니다. 강단에 기타를 들고 올라가면 안된다. 예배에 피아노 이외의 악기는 사탄의 악기다. 사실 피아노가 교회의 유일무이한 악기로 사용되기 전에는 술집에서 사용되던 악기라는 것을 아시나요? 강대상에 신발을 신고 올라가면 안된다. 기도를 마칠 때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가 빠지면 이단이다. 목사는 “주의 종”이니까 건드리면 안된다. 주일 성수, 십일조 생활 강조, 식사 기도, 금연, 금주 등등. 제가 한국에서 장로 교회를 다녔는데요. 사촌 누나가 세례를 받아야 된다고 하도 졸라서 그렇게 하기로 했는데 여러분도 아다시피 장로교회에서는 세례를 받기전에 세례 문답을 6개월 공부해야 합니다. 그래서 목사님을 만나서 이제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외우고 나서 세례 문답 교재를 받았습니다. 집에 교재를 가져와서 첫 페이지를 열어보니 “세례 받을 사람은 술을 마시면 안된다”라고 되어있습니다. 두번째 페이지를 열어보니 “세례 받을 사람은 담배를 피워도 안된다”라고 되어있습니다. 지금도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1978년도 이야기입니다. 그 때 저는 대학교 1년생이었는데요. 과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술 마시고 다방에서 담배피고 그러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니 제가 세례를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대로 그 교재를 덮어버리고 결국은 세례를 못 받고 그해 12월에 미국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 이듬해, 그러니까 1979년 부활절에, 페닌슐라 한인침례교회에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침례를 받는데 이거 딱 한가지 물어보더라구요. 예수님을 당신의 구주로 받아들이십니까? 그렇게 쉬운 침례 조건이 어디 있습니까? 혹시 우리는 사람들이 만든 전통 때문에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에서 멀어지게 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여기에 예수님이 그들을 정면으로 도전하십니다.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물론 이사야 선지자가 이 말을 했을 당시의 상황이 다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마음에도 없는 입술로만 예배를 드리는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람들이 만든 전통만 잘 지키면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다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런 와중에 정작 지켜야 했던 하나님의 계명은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바리새인과 서기관 사절단을 다루신 후 사람들을 불러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먹는 것이 사람을 성결치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나오는 것들이 사람을 성결치 못하게 하느니라. 음식은 마음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마음에 들어가지 않는 것은 사람을 오염시키지 않습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이 사람을 오염시킵니다. 하나님이 예레미야 17장 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예레미야 17:9> 영어 번역은 더 재미있습니다. The heart is deceitful above all things and beyond cure. Who can understand it?’ 즉 마음이 모든 것 위에 더 거짓됨이라. 고칠 길이 없도다. 그걸 누가 알리요? 고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옛날에 하나님은 이미 다 아셨습니다. 그동안 사람을 겪어 보셨으니까 그런 말이 나올 법도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에 대한 예를 드십니다. 음란,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독, 속임, 음탕, 질투, 비방, 교만, 우매함 물론 이것들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말씀의 교훈은 무엇입니까? 사람이 만든 교회의 전통을 가지고 사람들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먹는 것 가지고 사람 시험에 들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악한 생각을 품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대신 성령의 열매를 맺으라는 것입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기도하겠습니다. 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