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 11일 주일 설교 Sean Chang, 8월 11, 20248월 19, 2024 여러분은 성경책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무엇이라고 하시겠습니까? 여러가지 답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역사이다. 역사책이다. 믿음의 본을 보여주는 책이다. 우리에게 주신 신앙 생활의 guide이다. 다 맞습니다. 거의 백만에 가까운 단어로 쓰여진 방대한 성경을 한 마디로 표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몇 주 전에 Joshua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Amazon Prime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어느 날 한 시골 마을에 Joshua라는 목수가 나타납니다. 아무도 그가 어디서 왔는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모릅니다. 그는 말없이 태풍으로 쓰러져 몇 개월간 방치되었던 침례 교회를 수리하기 시작합니다. 그의 행동을 보고 제일 먼저 달려든 사람은 말을 더듬는 덩치 큰 중년의 흑인이었습니다. 이어서 그전에 그 교회에 다니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모이더니 어느새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교회를 재건하는 project에 참여하게 됩니다. 교회 재건이 거의 끝나고 마지막으로 교회 종탑에 종을 거는 문제만 남았습니다. 배운 것은 없지만 평신도로서 신실한 믿음을 가진 그 중년의 흑인에게 교회 재건에 가장 먼저 뛰어든 사람이니까 교회 종을 달 자격이 있다고 Joshua가 말합니다. 그래서 무거운 종을 들고 한걸음 한걸음 사다리를 올라가서 간신히 종을 달았는데 갑자기 그 종탑에 있던 비둘기들이 난리를 치는 바람에 이 중년이 그 높은 데서 떨어집니다. 죽은 듯이 땅에 누워있는 그 사람을 우선 교회 안으로 옮기고 그 얼굴에 보자기를 씌웁니다. 사람들이 다 나간 후에 Joshua가 누워있는 그 중년에게 몇 마디 하더니 그를 일으켜 세웁니다. 그런데 교회에 들어오던 천주교 교회의 부사제가 이 기적을 목격합니다. 난리가 났습니다. 그 소문이 인근에 있는 천주교 교회 신부의 귀에까지 들어갑니다. 그렇지 않아도 개신교 교회가 다시 건립이 되어 사람들의 관심이 그쪽을 쏠리는 것 때문에 심기가 불편했는데 이제는 죽은 사람을 살렸다는 소문까지 들립니다. 그래서 그 신부는 다른 몇 신부를 데리고 Joshua를 찾아가서 당신이 성경을 잘못 가르치고 있다고 도전을 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면서요? 그리고는 성경책을 쳐들면서 당신은 이 책이 무슨 책인지 잘 모르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Joshua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love letter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지 두려워할 하나님이 아닙니다. 네 맞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love letter입니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여러 말씀과 사건을 통해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주일 설교에서 제가 주로 다루는 것이 복음서인데 이 네 개의 복음서는 예수님이 주인공으로 나옵니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극적으로 보여준 것이 예수님의 희생입니다. 설교자로서 저의 책임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이 예수님에 대해서 잘 알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알기를 원합니다.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어떤 취향인지 무슨 취미를 가지고 있는지. 하물며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그 예수님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누구시며 그의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알아가야 합니다. 여기에는 상당히 의지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저는 설교의 방향이 여러분에게 감동을 주는 명 연설 보다는 어떻게 하면 여러분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좀 더 자세히 알게 할 수 있을까에 집중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조금 딱딱할 수는 있어도 시간이 지나면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 깊어져 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물론 영적인 양식이라도 딱딱한 음식을 너무 오래 먹으면 체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설교를 20분안에 끝내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딱딱한 영적 음식 뿐만 아니라 예배 후에 육신을 위해 맛있는 음식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축복이라 생각합니다. 지난 주 말씀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 사람들이 영원히 있을 양식을 위해서 일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렇게 물어봅니다. 그것이 어떤 일입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가르쳐 주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보낸 사람을 믿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영원토록 있을 양식을 얻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본문 말씀을 통해서 자신이 생명의 떡이라는 점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하십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우물가의 여인요한 복음 4장에 보면 우물가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때에는 만난 장소가 우물가여서 주로 생명수에 집중했습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오늘 본문은 오병이어의 기적이 있었던 상황이기에 주로 떡에 집중을 합니다. 그런데 이 두가지 다 그 영원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 분명 이것은 육체에 필요한 음식과 물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육신이 음식이 필요하듯이 영적 음식도 필요하다는 연결을 시키시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 우리가 성찬식을 했듯이 떡과 포도주 이 두 가지가 우리가 예식 가운데 먹고 마시는 음식이라는 것이 단순한 우연이었을까요? 예수님의 몸이 십자가에 달리고 피를 쏟은 것이 단순한 우연이었을까요? 예수님은 지금 계속해서 우리의 죄를 위해 자신의 몸이 찢기시고 피를 흘리실 사건을 은연중에 연결을 시키고 계십니다. 오늘은 본문에서 하늘에서 내려오신 떡, 즉 예수님 자신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사렛 마을의 사람들이 믿지 않습니다.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 어쩌면 그들에게는 당연한 질문일 지 모릅니다. 오늘날도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말을 하지요. 어떻게 처녀가 아이를 낳을 수가 있어요? 그건 조작해낸 신화일 뿐입니다. 그러나 지난 주에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이 천지 창조를 하신 것을 믿는다면 하나님한테 그 정도는 식은 죽 먹기 아닙니까? 예수님은 인류사상 최대의 사기꾼이든지 아니면 정말 본인이 말하는 대로 우리를 구하려 인간으로 태어나신 하나님의 아들이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는 이 둘 중에 하나를 선택을 해야 하는데 예수님이 자신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을 잘 들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현명한 선택을 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자신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느니라. 내게 오는 자들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이 말씀을 놓고 신학자들 간에 많은 의견이 오고 갑니다. 이는 장로교에서 강조하는 칼빈 선생의 예정론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예정론이 무엇입니까? 영어로는 predestination 혹은 election이라고 합니다. 잘못 이해하면 각 사람의 운명은 이미 창세전에 정해졌다는 것인데 사실 이것은 칼빈 선생의 예정론을 잘못 이해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비쳐보아 이런 논리입니다. 하나님이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그럼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의 구원은 하나님 맘대로다? 더 나가서 나의 믿음과는 상관없이 구원받을 사람은 구원받는 것이고 하나님이 이끌지 않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그럼 전도는 뭐 때문에 하는 것이고 믿음 생활은 왜 하는 것일까? 우리의 선택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인가?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그렇지요?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는 구절은 이사야 54:13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앞으로의 일을 말씀하십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이 구절인데 예수님이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하시는 말씀은 이런 거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들이 내게로 즉 예수님께로 간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듣는다는 말은 단순히 귀로 소리를 듣고 만다는 그런 뜻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한다는 뜻이 있다고 언젠가 말씀드렸습니다. 즉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이 누구는 구원을 또 다른 누구는 멸망을”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이끄십니다. 그런데 선택은 우리가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시는 부분이 있고 우리가 해야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또 이 선택이라는 것에 걸려서 그 이상으로 넘어 가지를 못합니다. 우리의 선택도 행위라고 합니다. 그래서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과 맞지 않다는 논리입니다. 그러나 선택, 즉 믿기로 선택하거나 믿지 않기로 선택하는 것이 행위인가요? 성경에서 행위라고 하는 것은 이런 믿음의 선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행동으로 옮기는 그런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구원을 받기 위해서 고행을 한다든지, 성경 공부를 한다든지, 주일 성수를 한다든지, 아니면 헌금을 한다든지 이런 것들이 성경에서 말하는 행위입니다. 그런 행위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히려 구원을 받은 후에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행위가 있는데 그것은 믿음의 결과이지 구원을 위한 전제 조건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점 여러분에게 혼동이 없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마지막 구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이 생명의 떡과 연결을 시키십니다.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그리고 우리가 아는 대로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시려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에 대한 대가를 치루셨습니다. 이 생명의 떡이 우리 앞에 놓여져 있습니다. 이 떡을 먹으면 우리는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즉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받아들이시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마지막 날에 다시 살 것입니다. 이 떡을 거부하면, 즉 예수님을 거부하면 지옥에 가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이것이 신약의 4 복음서가 말하는 복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설교